나는 정식 은퇴를 준비하던 지난 2007년 즈음, 나의 호서대 근속 20년, 농촌전도 40년, 그리고 20여 회를 훌쩍 넘긴 성지현장세미나 지도.., 내 주된 사역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가진 바 있었습니다. 그것을 여기에 인사의 말씀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나는 평생에 네 번의 종이 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첫 번째는 배움의 종이었습니다. 1960년대 한 시골뜨기가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하면서 처음 몰입했던 공부는 신구약 개론, 그 외에도 마카비 혁명과 하스모니안 왕가, 그리고 당대 종파 간의 이해를 담은 역사로서의 신학이었습니다. 그런 나의 지적 호기심에 더 깊은 학문적 정진의 동기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선생님이 내준 숙제 한 편, 그리고 그분의 칭찬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번역해오라는 숙제였는데 내 번역을 읽으신 선생님은 나에게 “번역 문장이 아름답다”라는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평생에 그 어떤 동기보다도 나를 오랜 ‘배움의 종’이 되도록 이끈 것은 고 문상희 선생님의 유언이었습니다. 평소에 “먼저 사람이 되라”고 즐겨 조언하셨던 그 분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서 박사, 나는 먼저 가지만 열심히 공부해야 해! 하늘나라에 가서도 서 박사와 학문적 대화를 나눌거야”라는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라의 종이었습니다. 내가 군에 있던 시절의 군대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학사장교로 임관한 나는 박격포 포대 소대장으로 처음 부임한 이래, 얼마 지나지 않아 소대장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는 계기를 맞으면서 그런 열악한 환경에 처한 병사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병사들이라 생각하고 전투력뿐 아니라 위생과 건강에 이르는 모든 환경을 열심히 돌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어떤 미군 고문관이 실시했던 불시점검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목양의 결과가 성과로 나타나는 것을 바로 그때 체험하였습니다. 평소에 실전과 같이 임했던 병영에서의 목양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진가를 발휘하는지 그 결과로써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 그 장병들은 나와 많은 연령차가 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군대라고 여기며 ‘나라의 종’으로서 힘을 다했던 나의 목양에 잘 따라주었고, 그 경험은 내 평생 리더십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청년 복음화의 종이었습니다. 나는 나를 서(徐) 군으로 불러주시던 김활란 박사님의 추천을 받아 1967년 다락방전도회에서의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도시 뒷골목, 사창가, 달동네 등을 찾아 불우여성(윤락녀), 근로 청소년(넝마주이), 빈민촌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상담하면서 정신없이 초임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났을 때 김활란 박사님께서는 Program Secretary라는 직책에서 General Secretary라는 직급으로 올려주시면서 활동비도 올려주셨습니다. 그 당시 이화대학 경비원 봉급이 7,000원이었는데 나는 5,000원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곳에 내 젊음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이 언제 미국에 가느냐고 물으면 나는 “이곳이 대학원이고 박사원이다. 나는 미국이 아니고 농촌으로 갈 것이다”라고 답하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청년 복음화의 종’으로 젊음을 보낸 후에 내가 가게 된 곳은 농촌이 아니라, 농촌 벽지에서 목회하는 주의 종들이 많이 공부하는 선지동산 호서대학교였습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종들의 종’이 된 것입니다.
네 번째, 종들의 종.
나는 지난 20여 년 호서에서 주님의 종들을 돌보는 동안 그곳을 어떤 교육 행정의 기관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교목실장, 교무처장, 연합신학대학원장, 대학원장, 인문대학장, 부총장직을 역임하였지만 이곳은 하나님의 선지 동산이며, 하나님의 귀한 종들을 그분이 보내셨다는 일념으로 임하였습니다. 그들이 보다 향상된 목회 패러다임으로 전향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 논문을 지도함은 물론, 각별히 힘을 쏟았던 일은 무엇보다 장학금 조성 사업이었습니다. 20대에 소외된 지역 미자립 교회의 전도사님 자제들을 위해 시작했던 장학금 모금 운동을 호서대학교에 부임해서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주의 종들의 학업을 돕고자 매진한 것이, 은퇴할 즈음인 2006학년도 1학기에는 1억 3,500만원을, 2학기에는 1억 5,300만원을 모금함으로써 약 540여명의 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끝으로, 내가 이와 같은 네 가지 종의 옷을 입고 행한 사역들을 마칠 즈음, 뜻하지 않게 제자들과 함께 본 연구원을 설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연구원의 설립은 최종적 하나님의 명령(God’s imperative)이었습니다. 그것은 앞서 젊은 날,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행하게 하셨던 그 모든 과업의 열매를 다시금 소성케 하는 숨을 불어넣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영과 활보했던 그 모든 현장과 그리고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마치 다시금 묵시의 환경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상태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시대! 새교회! 새목회!
새 시대는 반드시 새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새 교회란 반드시 새로운 목회를 통해서만 비롯됩니다!
이로부터 다시 10년이 더 흘렀습니다.
내가 젊은 시절 다락방전도회에서 나무도 심고, 사람도 심고, 정신도 심는 운동을 하며 15년 정도를 지냈을 즈음, 하나님의 손길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끌어가셨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네 가지 종(δοῦλος)의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염려가 되었던 것은 사실, 내가 앞으로 갈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 내가 두고 나왔던 바로 그 세계들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믿습니다. 나에게 임하시고 이끄셨던 하나님의 영을 믿으며, 또 우리 후배들에게 동일하게 임하시고 이끌어내실 그 하나님의 영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그 수고를 보시고 더 큰 부름으로, 더 놀라운 지평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창대케 되리라는 말씀을 믿고 힘차게 출발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우리 모두는 진정한 이 시대의 밀알이 될 것을 하나님 앞과 동지들 앞에서 엄숙히 결의를 다지는 바입니다.
성서와교회연구원 원장 서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