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종교

너희 중에 누구든 크게 되려고 하면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누구든 주인이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온 것이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마가복음 10:43-45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처음 동기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달리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 곧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고 정치적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킬 왕으로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위 본문은 예수님이 그와 같이 등극하였을 때 높은 요직에 앉고 싶어한 제자들의 통속적인 의도를 제자도로써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섬기는 사람(종)으로서의 소임을 실천하고 자기희생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삶으로의 결단을 뜻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의도를 깨달은 것은 아주 훗날의 일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은 “네가 나를 믿느냐”가 아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고, 이내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당부였습니다.

아울러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다니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늙어지면 팔을 벌리겠고 남이 네게 띠를 띠워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삶에 있을 고난과 역경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로켈이라는 성서학자는 사도 바울이 받은 최고의 축복은 그가 주님 예수님과 함께 살고 그와 같이 자기의 목숨을 바쳐 죽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자기 손으로 벌어서 충당해가면서 소아시아와 유럽의 많은 땅을 누비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바울에게 찾아온 것은 가는 곳마다 핍박과 반대와 역경이었으며, 마지막에 그에게 주어진 것은 참수형에 의한 순교였습니다.

주님은 바울의 몸에 있는 가시도 제거해 주시지 않았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만 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고백하면서 고난의 종으로서 주님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이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바로 헌신한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주의 종들과 무명의 전도자들이 증거한 복음에 의하여 로마 세계를 무력이 아닌 복음으로 정복하였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꾸는 예수님에 대해 쓰면서 예수께서 전도활동을 시작하실 때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쫓았으나 모두 실망하고 결국에 남은 이들이 12명이었다고 말하면서, 그 중에도 한 명은 예수님을 배신하였고 마지막 순간에는 모두 다 떠나갔다고 기술하면서 그렇게 떠나간 제자들이 어떻게 주를 위해 헌신하게 되었는지는 수수께끼라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는데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통치의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사랑, 이것이야말로 복음 중의 복음이며 인간의 마음을 정복한 위대한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차별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분은 국경과 인종과 신분을 초월하여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무지한 자든 유식한 자든, 귀족이든 노예이든, 애국자이든 매국노이든,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공평한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내 부모요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희생의 속죄양이 되심으로 인류와 세계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 사랑의 불이 붙는 곳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증오와 미움과 분노와 경쟁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좌절과 실패와 학대로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인 것은 사실이나 결코 기복종교는 아닙니다. 복 받는 것이 전부였다면 기독교는 우리나라에까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의 생애는 실로 자기 초월의 사랑과 헌신의 결단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에비슨 박사는 선교사 언더우드의 한국을 소개하는 강연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져 토론토 의과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임신 중인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왔습니다. 아무런 보장도 조건도 없이 오직 한 영혼의 생명을 사랑하는 숭고한 믿음으로 이 땅에 왔던 것입니다. 그의 노력으로 세브란스 병원과 의과대학이 세워졌습니다. 그가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지도자 양성에 일생을 헌신한 것은 바로 살아있는 신앙 전통의 맥이었습니다.

선교사 스크랜톤의 신앙에 영향을 받고 목사가 된 상동감리교회의 전덕기 목사의 짧은 생애는 오직 이 나라의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무지와 질병과 가난에서 해방시키는 일념으로 헌신한 생애였으며 민족 독립을 위한 기도와 설교와 봉사를 하다가 투옥되어 마침내 목숨을 바친 위대한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한국교회에 도도히 흐르는 위대한 전통의 물결 속에는 자기희생과 자기 초월의 믿음과 사랑으로 자기를 버린 선각자들의 영혼이 숨 쉬고 있으며 그 맥박이 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교회가 서 있는 터전인 것입니다. 고난 없이 영광을 취한 신앙은 진실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거쳐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한 신앙만이 미래를 창조하고 오늘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창조적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 전 켈커타의 봉사자 테레사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에는 너무나도 교회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또 하나는 너무나 돌봐야할 사람들이 많은 데 또 놀랐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아픔입니다.”

일생을 오직 가난한 자 중에 가난한 자를 위해 살겠다고 헌신한 한 할머니의 외침이었습니다.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그의 외모나 사회적 지위나 성취에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의 정신과 그의 신념, 그의 영혼, 그의 마음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단구의 작은 여인은 세계의 수많은 여성 중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여성이 되었으며 헌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여 그 상금을 그가 일생을 통해 헌신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봉헌하였고 오늘도 기도와 봉사와 사랑의 실천에 헌신하였습니다. 희생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습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거짓된 사랑이요, 사랑 없는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안양 나사로 마을의 나환자를 돕는 후원자 가운데 무교동의 야간업소(월드컵) 종업원들이 있었는데 저들은 수년간 이 일을 계속하며 그곳 신부님에게 절대 비밀로 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그 사실을 말하게 되면 후원 사업을 끊겠다고 하였답니다. 물론 신문 작은 면에 그 소문이 소개되어 세상에 알려졌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바로 이런 아름다운 마음들, 사랑의 마음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본훼퍼가 말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복음의 정신으로 거듭난 자이며 종말의 신앙을 갖고 생명을 돌보며 일하는 작은 예수로서의 새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마음 속에 부활의 계절, 4월에 깨어나는 새 생명으로 위대한 사랑의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을 다짐하는 바입니다.

[영감의 숨결] 사랑의 종교

청아 서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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