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증보판] 천안만세운동과 미주민족운동

안형주 | 발행일 2019년 2월 28일 | ISBN 9791195359097 | 상 하권

편집인 개정증보판 후기

이곳 천안은 3·1절 기념일이 사실상 3월 29일이다. 3·1만세운동을 한날 한시 한번하고 끝낸 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기념하여 지난해 내가 속한 연구소에서 발행했던 역사 기록의 개정증보판을 방금 인쇄소에서 받아왔다.

이 책에 보면 ‘사진신부’라는 챕터가 있다. 국내에서 먹고 살기에 막막한 여성들이 선발로 이민 간 남성 노동자의 신부감으로 사진만 보고서 미국을 갔는데, 실물을 보니 사진과는 완전 다른 사람들인 경우가 태반이었다고 한다. 바로 그렇게 이주한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 ‘사진신부’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에 안 든다고 돌아올 수가 없었다. 돌아올 여비도 없거니와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니 영어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럴 때 예비 신랑들은 신부감을 회유하려고 갖은 애를 쓰되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은근히 겁을 줬다고 이 책은 전한다. 저런 결혼증서를 가지고서.

‘양소사’라고 영문으로 적힌 결혼증서

영어를 모르는 신부들은 금박이 박힌 저런 결혼증서가 엄청난 법적 효력이 있는 줄 알고서 이젠 틀렸구나 하고 체념하고 살았다 한다. 그런 신부 중에는 처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과부도 있었다. 이 책에 소개 하는 한 과부의 이야기가 심금을 울린다.

조선에서 낳은 아이들 중 1살짜리 딸만 데리고 미국으로 간 양소사라는 과부의 이야기이다. ‘소사’(召史)는 과부란 뜻이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생활에 적응이 되자 친정에 두고 온 14살짜리 아들을 호놀룰루로 데려오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하지만 나이가 어려서 방문객으로도 데려올 수가 없었고, 학교를 안 다녀서 학력이 없으니 유학생으로도 초청할 수 없어 끝내는 성공하지 못 하였다. 14세 소년인 양소사 아들은 하와이 이민을 단념하고는,

“아버지 제사나 지낼 수 있도록 사망일을 알려달라”

ㅡ는 애절한 마지막 서신을 끝으로 1917년 4월부로 모자 간의 소식은 완전히 두절되었다고 한다.

이런 비극은 양소사라는 여인뿐 아니라 모든 이주자들에게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살기 어려운 미주 한인들의 동력으로 마침내는 대한민국이 건국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기독교로 치자면, 예루살렘의 붕괴로 사실상 끝나버린 유대인의 ‘나라’가 이방에 거점을 두었던 유대인들을 통해 전혀 다른 차원의 재기에 성공을 이룬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였던 이치이다.

여러분이 역사라는 크로노스에서 접했을 미주, 하와이, 이승만, 김구, 한인 이주 노동자… 이런 키워드들을 이 책에서는 그 역사를 살아낸 각 이주 노동자들의 개별 카이로스로 전한다.

끝으로.

이와 같은 개별 카이로스들이 이 책을 통해 다시 살아나 숨쉴 수 있게 된 것은, 100년 된 교회인 천안 하늘샘교회의 현 담임목사 이성수 박사님과 저자 안형주 선생의 만남 덕택이다(하늘샘 교회는 100년 전 이 지역에서 가장 최초로 세워진 감리교회).

올해 83세이신 이 저자는 바로 100년 전 이 교회를 설립한 분의 손자였다. 저자의 할아버지는 100년 전 천안 3.1만세운동의 주모자로서, 더 이상 목회를 할 수가 없어 미국으로 건너가 이주 노동자들과 사진신부들이 일군 가정의 고단한 영적 삶을 지켰다. 그 이야기의 전말을 거대 민족사 틀에 담은 저자가 자신의 조부께서 설립한 교회로 100년이 지나 찾아왔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 100년 된 교회의 직제로서의 계승자 후손과 육친의 후손이 일종의 성서 편찬을 해낸 셈이다.

이것이 정경(Canon) 형성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 저자의 할아버지와 미주 교회 주일학교 선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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